우리 몸이 세계라면 – 과학이 삐뚤어질 수 있는 방법
Intro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을 만드는 일에 관하여
뒷표지에서 이 문구를 본 후 나는 이 책을 집어들어 서점을 나왔다. 이전에 김대식 교수의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를 읽을 때 기대했던 것처럼 혹시 “질문하는 방법”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을까 생각했다. 비록 이런 내용은 없었지만, 올해 읽은 최고의 책으로 꼽겠다.
김승섭 교수가 전공하는 역학(Epidemiology)은 인구집단에서 질병의 원인을 탐구하는 학문(p. 252)이다. 이 책 전반에는 1) 사회의 부조리함이 어떻게 특정 인구집단의 질병 발생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지식 생산의 주요 수단인 과학이 있다. 김승섭 교수가 소개하는 사례 중 다수는 이해 관계, 사회적 분위기 등이 과학하기와 콜라보하여 잘못된 방식으로 연구가 진행된 것이 원인이었다. 김승섭 교수는 과학이 어떻게 잘못 진행되었는지를 밝히면서 2) 올바르게 과학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들려준다. 첫 번째 이야기는 PD수첩 등 사회 고발 프로그램을 보는 듯 흥미로우면서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특히 이 부조리가 다른 나라, 다른 인종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기에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두 번째 이야기는 과학을 잘못된 길로 인도할 수 있는 요소가 무엇인지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나처럼 과학을 하는 사람은 물론 과학 지식에 노출되고 소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할 내용이다.
과학이 삐뚤어지는 방법
우리가 과학의 목소리를 신뢰하는 것은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합리적 사고 과정 때문이지, 그 결론이 진리를 담보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p. 241)
과학은 합리적 사유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오늘날 가장 신뢰받는 지식 생산 방법이지만 그 대상, 방법, 심지어 결과까지도 아래와 같은 외부 압력에 노출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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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1. 권력”에서 담배회사가 어떻게 연구자를 섭외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고, 그 결과를 경영에 이용했는지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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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력
“1. 권력”에서 신약 개발은 실제로 가장 사람을 많이 죽이는 병이 아닌, 고소득 국가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치료제 위주로 진행됨을 이야기한다.
“2. 시선”에서 일제가 동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어떻게 과학 지식 생산에 관여했는지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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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3. 기록”에서 흑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어떻게 그들의 건강을 악화시켰는지 이야기한다.
한국사회 또한 인종차별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pp. 160-163, 170-176). “한반도만 벗어나면 한국인은 전 세계 모든 곳에서 소수자라는 사실을 함께 기억했으면 합니다” (p. 178). 이 문구는 모든 특정 집단 내 기득권에게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기득권층을 보호해주는 울타리가 없을 때를 생각해볼 수 있도록.
“5. 시작”에서 흑인 매독 환자를 치료하는 대신 생체실험 대상으로 사용한 터스키기 사건을 소개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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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1. 권력”에서 성별에 따라 병원의 처방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여준다.
“1. 권력”에서 기존 의학 지식의 상정하는 표준 대상은 성인 “남성”이었으며, 이렇게 만들어진 지식이 여성에게 어떤 피해를 줬는지 이야기한다.
“4. 끝”에서 전염병 환자 돌보는 일을 여성이 맡음으로써 여성의 질병 사망률이 높았다는 이야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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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
“5. 시작”에서 종교적 세계관의 권위에 도전한 사례를 보여준다(갈릴레오 등).
“6. 상식”에서 기존 패러다임(갈레노스)의 권위에 맞선 사례(베살리우스, 하비, 제멜바이스)를 보여준다.
위의 항목 중 사회적 차별과 관련 있는 것들도 있는데(인종, 성별, 국력), 이로 인해 터스키기 사건처럼 비윤리적인 연구가 탄생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터스키기 사건은 미국 정부까지 그 차별을 진행하도록 승인했던 충격적으로 비윤리적인 연구였다. 터스키기 사건의 백인 과학자들이 “그 흑인 집단은 연구를 위한 조건에 부합하는 완벽한 집단이었습니다”라며 결백을 주장하는 것은 그들이 흑인의 생명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것의 반증이 된다. 만약 그 연구 집단이 그들의 가족이었다면 그 때도 지식 생산의 사명감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흑사병, 역병 등 공포스런 전염병 때문에 주변사람이 실시간으로 죽어가는 상황에서 과거의 제한적인 지식을 가지고 어떻게든 대응하려 노력하던 모습이 아주 처절해보였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이 공포 때문에 결국은 종교에 기대거나 마녀 사냥 등 다른 피해자를 만들기도 했다.
과학은 데이터로 말한다
외부 압력이 개입한 지식과 더불어 김승섭 교수는 근거가 부족한 지식을 주의하고자 한다. 개인의 경험을 근거로 삼지 말 것(“6. 상식” – 의사 스폭의 조언과 안아키)에서 진행된다. 또한 기존의 지식을 당연하게만 생각하지 말고 실험 데이터로 항상 검증하고 필요하다면 의문을 제기하는 자세를 강조한다.
지금 내 생각이 틀린 것일 수 있다는 비판적 사고는 인류가 과거의 상식과 맞서 싸우며 이 세상과 인간에 대한 더 나은 설명을 제공할 수 있었던 거대한 원동력이었습니다. (pp. 316-317)
과학 발전
그러나 이 질문이 인류 역사에서 가지는 함의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p. 247)
중학교 과학시간에 탈레스가 세상이 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 것, 엠페도클레스가 세상은 4개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 것 등 고대 그리스 과학자들이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배운 적이 있다. 그때는 단순히 옛날 사람들이 세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배우는 정도, 과학 교과서 초반에 등장하는 준비운동과 같은 딱히 어렵지 않은 가벼운 내용 정도로 생각했었다.
이 책에서는 고대그리스 사람들이 세상을 구성하는 물질에 대해 질문할 당시의 상황을 함께 설명해준다. 당시에는 세계관, 과학 등 대부분의 활동에 종교가 관여하고 있었다고 한다. 신들의 가르침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의 사유로 세계를 설명하려는 노력의 시작 중 하나가 고대 그리스 사람의 자연철학인 것이다. 비록 그들은 정확한 설명을 내놓지 못 했지만, 그 시도로 인해 인류가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에 대해 스스로 고민하게 되었고 오늘날의 지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합리적인 사유를 통해 질문에 답하는 방법이 다른 분야에도 적용되기 시작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학문이 발전할 수 있던 것이다. 토마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 내용과도 잘 들어맞는다.
여섯 소제목
김승섭 교수는 두 글자의 낱말 여섯 개를 사용해 이 책의 소제목을 구성했다. 낱말 선정을 참 기가막히게 해놨다. 예를 들어 두 번째 소제목 “시선”은 세 개의 부제로 이뤄져 있다. 첫 두 개는 일제가 어떻게 지식을 왜곡시켰고 이를 식민지배에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이야기하고, 마지막에서는 조선시대에 새로운 지식을 만들고자 노력했던 세종에 대해 이야기한다. 일제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나서 1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왜 굳이 제목을 시선이라고 두었을까 의문을 품었다. 세종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나서 제목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을 했다. 2장을 “보는 것과 보지 않는 것”이라 소개했는데, 세종이 정말로 조선에 필요한 지식을 고민했던 부분이 보는 것이라면 일본인이 지식을 왜곡한 것이 보지 않는 것이다. 이 둘의 대비가 2장의 제목이 된 것이다. 각 제목이 어떻게 지어졌는지는 각 장의 프롤로그(혹은 장 요약)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글 쓰는 방식
김승섭 교수의 문장 전개 방식은 담담하면서 신사적이고 명료하다. 읽기에 부담이 없다. 또한 구체적인 근거를 자주 보여주기 위해 논문 결과를 자주 인용하는데, 정리가 아주 잘 돼있다. 무엇을 위해 무엇을 했고, 어떤 결과가 나왔다는 등의 내용을 읽고나면 전혀 모르는 논문이라도 개요는 다 파악한 것 같이 느껴진다.
또한 재미있게 전개하고 맺을 줄 안다. 각 장이나 문단의 도입부에서는 재미를 위해 서술 순서를 바꾸기도 한다. 예를 들어 28쪽에서는 소설 줄거리부터 요약한 후 어떤 소설의 줄거리였고 왜 이를 언급했는지 진행해나간다. 인용구로 시작하는 경우도 있고(31, 33쪽 등), 이전 문단의 질문을 답변하는 식으로 시작하기도 한다(102쪽). 마무리에서는 책 내용과 어울리는 시를 인용하기도 한다. 55, 56쪽에서는 고정희의 시를 인용했는데, 마치 담배회사의 미사여구와 같은 광고 전략을 적이 숨어 있는 꽃밭으로 비유한 것 같다.
담배회사의 전략을 보며, 고정희 시인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p. 55)
기타
인연이 닿는 연구를 한다. (조선일보 인터뷰 중)
나 역시 인연이 닿아 지금의 연구를 하고 있다. 내 연구는 이 땅에 필요한 지식인지, 필요한데도 생산되고 있지 않은지, 혹은 필요 없을지…
단언컨대 저는 누군가의 멘토가 될 생각이 없어요. 이렇게 얘기해보죠. 심리학 등 많은 기존 연구 결과를 보면 어떤 사람이 창조적 결과물을 내놓는 건 그이의 삶이 가장 안정적일 때입니다. 기업가든 학자든 예술가든 예외가 거의 없어요. 칸트가 철학사에 일대 혁명을 가져온 건 정규직 교수 자리를 딴 이후죠. 우리 사회는 젊은 친구들에게 도전해서 창조적 결과물을 내놓길 요구하지만, 그 바탕이 되는 조건을 마련해주는 데는 별 관심이 없어요. 실제로는 안정적인 환경이 도전과 창조를 낳는데도 말이죠. 그래서 전 학생들에게 무작정 도전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기성세대로서, 학자로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이 덜 불안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일보 인터뷰 중)
162쪽에서 기술한 연구 방법을 보면 4개 범죄 키워드로 검색한 결과가 21,866건이고 이를 분석 데이터를 사용했다. 저 많은 수의 기사를 직접 인터넷에서 수집한다면 보건학 연구는 대학원생 건강에 좋지 않을 것이다. 이럴 때 코딩이 필요한 것 같다. 이전에 아는 동생 남자친구가 나에게 용돈 벌이 수단으로 웹크롤러를 코딩해보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새로운 코딩 분야라는 흥미로만 재미있어 했었지만, 의외로 가까운 사람들이 이 코드를 필요로 할지도 모르겠다.
163-176쪽에서 카마라 존스 교수의 인종차별이 차별 받는 사람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쓴 논문을 소개하는데, 그 논문의 전개 방식이 아주 흥미롭다. 한 이야기로 시작을 한다. 정원사에게 차별당한 분홍 꽃, 꿀벌을 거부하는 분홍 꽃의 내재적 차별에 대한 이야기인데, 논문에서 하려던 말(사회적으로 차별당하고 결국에는 스스로를 차별하게 되는 흑인)과 아주 잘 맞는 비유이다.
과학자들은 집요하면서도 정밀한 노력으로 작지만 튼튼한 이야기들을 쌓아 올립니다. (p. 207)
제목 | 저자 | 출판사 | 판 | 출간 | 완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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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몸이 세계라면 | 김승섭 | 동아시아 | 1 | 2018. 12. | 2019. 12. 04. |